노르웨이 출신의 세계적인 판화 작가가 지난 11일 오후 원주에 있는 한지공장을 찾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을 때 노르웨이 정부가 선물한 판화를 그린 트리에 리즈버그(Terje Risberg)다. 그가 찾은 공장은 콘크리트 블록 벽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보잘것없는 곳이다. 하지만 트리에 리즈버그는 전통적인 기법으로 만든 영롱한 색상의 색한지를 보고 "아름답다"고 감탄했다.

국내 대부분의 한지공장이 자동화된 것과 달리 원주 한지는 손으로 만드는 전통적인 제작 과정을 그대로 살려 제품을 만들고 있다.

닥나무 껍질을 삶아 탈색한 후 섬유질을 만들고 이를 떠 말려 종이로 만든다. 국산 닥나무만 원료로 사용한다. 이 회사가 만드는 색한지는 2백여 종류다.

이 회사 대표는 2000년 산림청에서 신지식 임업인으로 선정된 장응렬(48)씨다. 40여년간 전통 한지 생산에만 매달려온 김상렬(69)씨 등이 이 회사를 돕고 있다.

원주 한지는 품질이 우수하다. 2000년 일본 규슈(九州)산업대 나이토 이쿠오(內藤郁夫)교수가 일본의 전통 화지와 원주 한지를 비교 분석한 결과 일본 화지보다 가볍고 질긴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해 10월에는 국제품질인증(ISO 9001)도 받았다. 원주 한지의 생산 기법은 3대째 이어지고 있다. 張대표의 조부인 장기봉씨는 황해도 신계에서 한지를 만들었다. 이를 전수받은 아버지 석현씨는 한국전쟁 때 단신으로 월남해 원주에 터를 잡았다. 원주는 닥나무와 관련한 지명 호저(好楮)면이 있을 정도로 한지 생산이 활발했던 곳이다.

張대표는 장남으로 어릴 때부터 한지 만드는 일을 거들었다. 그러나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전기기사로 나서 한지와 거리를 뒀다. 張대표가 가업을 잇게 된 것은 1985년 아버지가 타계하면서부터다. 선친이 "큰 돈은 못 벌어도 먹고는 사니 한지를 만들라"는 유언을 남기자 이를 받들기로 다짐했다.

처음엔 창호지와 초배지 정도의 한지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張씨는 조선시대 임금이 내린 어사화가 색한지로 만든 것임을 우연히 알고부터 고급 색한지 만들기에 나섰다. 하지만 만족할 만한 수준의 색한지를 만들어내는 데는 5년이 걸렸다.

색상을 내기 위해 밤을 새우며 실험을 했다. 마음에 안 들어 버린 종이가 4만여장에 달했다. 원주제지가 한달반 정도 만들어야 하는 분량이다.

가까스로 90년대 초부터 균일한 색상의 색한지를 만들었다. 서울 인사동 등 색한지를 재료로 공예를 하는 작가들에게서 품질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원주한지공예관 등 두개의 직영 판매장도 갖췄다.

원주 한지는 한달에 3만여장을 생산한다. 연간 매출액은 2억원에 불과해 아직 영세한 규모다. 그러나 張씨는 "전통 한지 생산기술을 더 다듬어 세계에 한지의 우수성을 알리겠다"고 말했다.

원주=이찬호 기자<kabear@joongang.co.kr>
2003.11.12 17:01 입력 / 2003.11.12 17:06 수정